지리산 백운계곡의 절경에 빠져들다
지리산 백운계곡은 경상남도 산청군의 단성면 백운리에 있는 계곡이다. 남명 조식(曺植)이 이곳을 세 차례나 유람하였다고 하여 삼유동(三遊洞)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의 동쪽 지맥인 웅석봉이 남쪽으로 맥이 뻗어 마근담봉을 이루고, 마근담봉과 백운산 사이에서 발원한 계류가 백운천과 백운동 계곡을 이루었다. 백운천은 남쪽으로 흘러나가다가 덕천강에 합류한다. 1487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남효온(南孝溫, 1454~1494)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는 "백운동을 지나는 골짜기 물은 덕천수(德川水)와 합해져 태연(苔淵)이 되고 이것이 아래로 흘러 진주의 남강이 된다."라고 기록하였다.
백운동 계곡은 인근 시천면 사리에 거처를 하였던 남명 조식과 관련된 유적도 전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남명선생장지소(南冥先生杖之所) 등의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다. 남명은 여기에서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는 시를 읊었다.
백운동마을로 알려진 점촌마을에서 시작되는 계곡은 약 2㎞를 이어가면서 맑고 푸른 자연의 장관을 보여준다. 기암절벽 아래 크게 자리 잡은 웅덩이는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저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라는 이름이다. 남명의 뜻을 쫓는 후학들이 스승의 높고 넓은 학문을 그리며 남긴 이름이 아닐까 싶다. 수량 많은 백운폭포까지 계곡은 지리산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마음껏 보여준다.
백운동에는 백운동 7현(賢)에 관한 이야기도 전한다. 다지소, 청의소·아함소·장군소 등 20여 개에 이르는 폭포와 소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한다. 골짜기 주변엔 화장암·한림사·용문암 등의 암자가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운동계곡
지리산 백운동 계곡
일시 : 2024년 07월 22일
날씨 : 맑음, 무더운 날씨(폭염주의보)
소재지 :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일대
행정 : 경남 창원시(08:00) ~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백운동 공용주차장(09:45 ~ 09:50) ~
쟁이소((다이소)10:08) ~ 용문폭포(10:28) ~ ~ 백운폭포(11:04) ~ 직탕폭포 (11:28) ~
지리산 둘레길 목교(11:47) ~ 무명폭포(12:03) ~ 쌍폭(12:09) ~ 임도다리(13:44) ~ 임도삼거리(15:02)
~ 홍계갈림길(태극종주길접속, 14:24) ~ 마근담봉(14:39) ~ 임도 ~ 용무령봉 ~ 용무령(지리산 둘레길접속) ~ 백운계곡 ~ 백운동 주차장
산행거리 : 12.03km
산행시간 : 6시간 22분
동행 : 달리는 거북이님, 산마
트랙
사진및 일지
여느 지리산 계곡보다 더 나은듯하다.
등천대
용문천 바위 왼쪽으로 좀 더 돌아가보면 남명선생장지소(南冥先生杖之所)라는 음각 글귀도 보인다. 남명 선생이 즐겨 찾아 휴식과 사색을 하던 곳인가 보다.
아함소 깊고 푸른 물 웅덩이로 길다란 소라는 뜻이다.
백운 폭포?
정말 아름다운 계곡이다. 수량도 엄청 풍부하고
용문폭포
다지소
직탕폭포
폭포에 일을 붙여놓으면 좋을듯하다.
쌍폭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다리
상류에 들어서니 수량이 줄어든다.
임도다리를 지나 조금더 진행하다 좌측 임도따라 간다.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 임도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하고 다시 우측 계곡을 지나 태극 종주능산으로 올라 떡바실재에 도착한다
이곳부터는 지리산 태극종주길이다
마근담봉
용무림산
둘레길을 만나 좌측 백운계곡으로 내려간다.
백운계곡에 도착하여 우측 으로 내려간다
내려오는길에 조식선생의 흔적을 찾아본다
백운동은 남명 조식(1501~1572)이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인정했던 동천이다.
19세기 말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 지역의 남명학파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등 구국의 남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3년 용문폭포 위쪽 바위에 '남명선생장구지소' 글자를 새기고 회합을 가진 곳으로 후학들이 남명과 그 정신을 추모하던 공간이다.
조식[曺植, 1501(연산군 7)~1572(선조 5)]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건중(健中) 혹은 건중(楗仲)이고, 호는 남명(南冥)·방장산인(方丈山人)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골[兎洞]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펼쳐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부친이 문과에 급제하자 서울로 이주하였다. 서울에서 이준경(李俊慶)·성운(成運) 등과 교류하였다. 1520년 사마시 초시와 문과 초시에 합격했으나, 그 다음해 합격에 실패하였다. 1526년 부친이 죽자 상을 마치고 의령의 산사에서 공부를 하였다. 1531년 생계가 곤란하자 살림이 넉넉한 김해의 처가를 찾아가 탄동(炭洞)에서 '산해정'(山海亭)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생활하였다.
1533년 향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회시에는 합격하지 못하였고, 1536년 다시 향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1537년의 회시에 나아가지 않았다. 1539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4년에는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하였다. 1549년(명종 4) 전성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2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관직에 나아가라는 이황(李滉)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그 뒤 1556년 단성현감, 1560년 조지서사지 등으로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서 학문에만 전념하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51년 오건(吳健), 1556년 하항(河沆), 1563년 김우옹(金宇顒), 1565년 최영경(崔永慶), 그 이듬해 정구(鄭逑)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다. 1561년 지리산 덕천동(德川洞)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1567년 5월 명종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 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하여 두 차례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치란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논하고 낙향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선조 때 대사간,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명집』·『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남명가」·「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전한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곽재우(郭再祐)·정인홍·김우옹·최영경·김효원(金孝元)·오건·이제신(李濟臣)·강익(姜翼)·문익성(文益成)·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곽일·하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어서, 조식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식은 경상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는데, 그의 문인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조식의 문인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조식은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중시하고, 특히 경(敬)과 의(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라고 하였다. 그는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하였다. 조식은 특히 실천궁행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식 (조선 전기 수양론, 2004., 정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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