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화성 행궁 , 수원화성 한바퀴

SANMA 2021. 5. 28. 15:58

화성 행궁 

개요 

수원 누나집에 갔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행궁을 둘러본다.  순대시장에 가서 순대볶음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어머니를 누나집에 보내드리고 누나, 누나지인 그리고 나는 팔달산이 있는 화성산성을 한바퀴 돈다 

화성행궁정조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힙니다.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되었다. 행궁(行宮)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일시     :   2021년 05월 25일 

날씨     :       맑음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일대 

행정   :   수원시 세류동 ~ 화성 행궁 ~ 팔달문(점심식사) ~ 화성 산성 ~ 동이포루 ~ 동포루 ~ 동북포루 ~ 화홍문  ~ 북동포루 ~ 팔달산(145.5m) ~ 팔달문  

거리   :   5.04km(팔달문~ 한바퀴 ~ 팔달문)   행궁 관람 제외 

소요시간  :  1시간 56분 + 행궁 45분 

누구랑   :   어머니.   누나랑 같이 

트랙 

사진 및 일지 

화성행궁 정무에서  이광장은 군인들의 무예나 무기술등이 바닥에 그려져 있다. 

누나와 어머니 

나하고 어머니 

누나하고 어머니는 무료 관람이고 나만 1500원 입장료를 지불하고 행궁을 관람한다 

600년된 노거수나무 

화성행궁관람을 마치고 

350년된 노거수나무가 2구루씩 양쪽에 심어져 있다 

순대국 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수원 화성을 한바퀴 둘러본다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이곳으로 내려온다,  앞에  보이는 성문이 팔달문 

팔달문으로 들어선다,   팔달문 아래로는 수원천이 흐르는데 

화성에는 750보 거리의 남북을 관통하는 수원천()이 정비되어 있는데, 화성성역 당시에는 대천()이라고 칭하였다. 축성 당시만 해도 매년 반복되는 범람이 문제였던 만큼 1794년(정조 18)년 3월에는 개천을 파는 준천() 작업이 시행되었다. 동시에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 개기()와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수문이 만들어질 자리를 정하고 하천 준설작업이 병행된 것이다.
광교대천이 성 전체를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준천작업은 화홍문 밖 600보 밖에서 시작되었는데, 멀리 광교산에서 여러 갈래로 흘러내려 오던 하천을 서쪽으로 유도하여 용연() 곁을 지나 화홍문을 통해 성곽 내로 들어오게 하였다. 광교산에 내려오는 물길을 광교대천()이라고 했는데, 용연을 침범하지 않게 제방을 따라 화홍문으로 들어온 물길은 대천()으로 이름을 바꾸어 남수문으로 흐르게 된다. 이 구간에서 너비는 20여 보(약 23.5m), 깊이는 반장에서 1장(약 1.5m에서 3m) 정도로 정비되었다. 또, 대천의 한가운데 즉 십자가로의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통하는 도로가 건너는 구간에는 길이 95척의 오교()라는 나무다리를 놓았다. 후에 이 다리는 매향교()로 이름이 바뀐다.
7칸의 홍예를 가진 화홍문을 지난 대천은 성곽 내의 하수()가 더해지면서 수량이 증가되어 남수문에 이르면 9칸의 홍예를 통과하게 된다. 이 때부터는 구천()이라는 이름을 성 밖으로 배출된다. 화성의 하천은 도시의 하수를 받아 흘려보내는 도시의 정화장치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된다. 또한, 도심으로 관통하는 예외적인 형상을 가진 대천은 그만큼 화성의 중요한 시설이다.

현재 수원천에는 팔뚝만한 잉어도 많소 여러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산책로가 수원천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다 

이꽃이 무슨 꽃인가?  

성벽을 따라 돈다 

누나(우측)와 누나지인 

성밖수원 시내 

성곽따라 

형제봉과 광교산도 

너무나 푸른 하늘에 연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다 

화성 안내도

앞에 보이는 팔달산으로 

팔달산

팔달산은 경기도 수원시 중심에 있는 시의 주산이다. 옛 이름은 광교산 남쪽에 있는 탑 모양의 산이라 하여 탑산으로 불렸고 지금의 이름은 조선 태조 때부터 불리기 시작하였다. 시내 중심에 있고 산 전역이 아름다워 1974년 팔달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원부읍지》에 '수원부의 주산이며 고적이 많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는 탑산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이 바뀐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인 이고()와 관련된다. 은퇴한 이고가 세상을 떠나 이 산자락에 살았는데 공양왕이 사람을 보내 근황을 묻자 "집 뒤에 있는 탑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 즐겁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가 은거하던 이고에게 벼슬을 권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화공을 시켜 탑산을 그려오게 하였는데 태조가 그림을 보고 "과연 사통팔달한 산이다"고 한 데서 이 산이 팔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도심 속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동서남북으로 시야가 탁 트여 시 전체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화성은 서장대·서노대·서포루·화양루 등 시설물을 거느리고 있으며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이들과 산의 조화가 고풍스러움을 자아낸다. 서노대에서는 한강 이남의 동서남북이 두루 조망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산은 수원시의 혈처에 해당된다고 한다.

산에는 3.2㎞의 순환도로와 3개의 약수터, 각종 운동을 위한 시설과 산책로를 비롯하여 강감찬 장군의 기마동상, 홍난파 노래비, 3·1운동 기념비, 효원의 종 등이 설치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 산림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1960년대 초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장대 

이급경사 내림길을 끝으로 수원 화성구경을 마친다 

 

 

 

이틑날 누나와 함께 광교저수지, 반딧불이 등산로를 경유하여 형제봉, 토끼재로 한바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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